RG-2026-006
서해에서
[AH] 가상 역사 · 4분 · 철학 · 서정 · 창작
지금 우리가 서해라고 부르는 이 바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늘 바다였던 것은 아니다. 약 8천 년 전, 이곳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저지대와 갯벌 평야, 강 하구의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 땅 위에서 조개를 캐고, 물고기를 잡고, 계절에 따라 사냥과 채집을 이어가며 살아갔다.
그러나 세상은 천천히, 그리고 거스를 수 없게 변하고 있었다.
빙하기가 끝난 뒤 지구는 따뜻해졌고, 얼음은 녹아 바다로 흘러들었다. 한 세대가 보기엔 그 변화는 미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몇 세대가 지나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바다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육지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의 강변은 오늘의 갯벌이 되었고, 어제의 숲은 내일의 얕은 바다가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삶의 방식 전체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사건이었다.
낮은 언덕 위에 지은 집은 더 높은 곳으로 옮겨야 했고, 저장하던 식량은 물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야 했다. 아이들이 뛰놀던 평지는 점점 사라졌고, 조개를 캐던 물가도 해마다 달라졌다. 사람들은 바다가 변덕을 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 철의 큰물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속도라는 것을.
그 시절의 기억은 오늘날 문자로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상상해볼 수는 있다. 어쩌면 어떤 공동체는 해마다 가장 높이 들어온 바닷물의 자리를 돌에 새겼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저기까지 물이 오르면 우리는 떠나야 한다”고 가르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세대는, 조상이 묻힌 땅과 자신들이 태어난 마을을 뒤로하고 더 높은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이별은 갑작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참혹했을지도 모른다.
마을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익숙한 길이 끊기고, 다음엔 식수의 맛이 달라지고, 그다음엔 조상 무덤 아래까지 물이 스며든다.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버틴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바다가 물러가리라 믿으면서. 그러나 어느 날, 돌아갈 수 없는 선이 넘어간다. 그때부터 떠남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 된다.
동아시아 바다 곳곳에는 이런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소들이 있다. 일본 최서단 요나구니 섬 근처의 해저 지형도 그중 하나다. 수중에 잠긴 거대한 계단형 암반은 오랫동안 ‘잃어버린 도시’의 흔적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자연이 만든 지형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신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짜 질문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자연이 만든 바위 위에, 인간이 손을 얹은 적은 없었을까.
파도가 깎아 만든 단차 위에 누군가 망을 보던 자리를 마련하고, 물 높이를 재기 위해 홈을 파고, 제사를 위해 작은 물건을 두었다면 어떨까. 전체는 자연이 만들었지만, 마지막 흔적은 인간이 남긴 것이라면 어떨까. 그 경계는 언제나 전설을 낳는다.
바닷속에서 발견되는 유물도 마찬가지다. 뼈로 만든 작살촉, 조개 장신구, 불에 그을린 말뚝, 낚시바늘, 붉은 안료가 밴 장례 흔적. 각각은 평범한 삶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사라진 세계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조용한 증거가 된다. 그것은 환상의 제국이 아니다. 돌로 지은 초문명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애틋한 인간의 자리다.
우리는 흔히 ‘대홍수’라고 하면 단 한 번의 압도적인 재난을 떠올린다. 그러나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대홍수는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세대에 걸쳐 계속된 해안선의 후퇴였고, 해마다 조금씩 삶을 잠식해오는 느린 재앙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긴 시간을 압축한다. 수백 년의 변화를 하나의 비극으로 묶고, 그것을 이야기로 남긴다. 그렇게 전설은 태어난다.
바다가 세상을 삼켰다는 이야기. 조상들의 땅이 물 아래로 사라졌다는 이야기. 돌계단 같은 바위와 잠긴 제단,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옛 마을의 이야기.
어쩌면 그 전설들은 완전히 허황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오늘날 상상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를 뿐이다.
그곳에는 황금 도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고, 아이를 키우고, 죽은 이를 묻고, 계절의 변화를 견디며 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바다가 너무 가까워졌을 때, 자신들의 세계가 끝나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사람들이다.
바닷속에 잠긴 것은 도시가 아니라 기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암반의 홈으로, 진흙 속 유물로, 섬에 남은 전설로, 그리고 우리가 지금도 되풀이해 묻는 질문으로 남는다.
저 계단은 자연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것인가.
어쩌면 정답은 둘 다일 것이다. 처음은 자연이 만들었고, 마지막은 인간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지형은 유적이 되고, 삶의 흔적은 신화가 된다.
바다가 돌아온 자리마다, 인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남겼다.